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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재

청송갤러리

  • 2020-11-30

성인봉(聖人峰)

성인봉聖人峰 99회차 묵언수행 2018. 10. 14. 일요일

울릉도 남쪽 도동에서 성인봉나리분지를 거쳐 북쪽 천부 쪽으로 종주하며 묵언수행하다

이제 백대 명산 중 아흔여덟 좌 묵언수행을 완료한 나는 섬에 있는 명산인 울릉도 성인봉과 홍도 깃대봉 두 좌만을 남겨두고 있다마지막 백 번째 묵언수행에는 몇몇 친구들이 나를 축하해주겠다며 같이 여행처럼 떠나자고 한다별 대단한 일도 아닌데 친구들이 그렇게 나서니 한편으로는 쑥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그래서 남은 울릉도 성인봉과 홍도 깃대봉 두 좌 중 어느 산을 먼저 묵언수행 할까를 고민하다가 아흔아홉 번째 묵언수행할 산으로 울릉도 성인봉을 정했다그 이유는 성인봉은 해발 987m로 산을 자주 오르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다소 부담이 될 수 있는 반면깃대봉은 해발 365m에 지나지 않아 비교적 편안하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5일 평양냉면 마니아 친구들 7명이 강남구청역 근처에 있는 평양냉면 맛집 <봉밀가>에 모여 냉면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이 자리에서 친구 가 나에게 불쑥 울릉도에는 언제 가느냐고 묻는 것이었다당시 나는 울릉도 성인봉을 홍도 깃대봉보다 먼저 수행하는 것으로 정했지만 날짜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그 자리에서는 에게 내일 알려준다고 하고그 다음날에 에게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울릉도에 갈 것이라고 기별을 했더니 도 함께 가겠다는 것이었다이렇게 해서 나는 와 함께 울릉도 묵언수행 겸 자유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오늘은 드디어 나의 친구 ’ 씨와 함께 2박 3일간 울릉도 성인봉으로 묵언수행 겸 자유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울릉도로 가는 배편은 묵호항에서 오전 8시 50분 울릉도로 출발하는 <씨스타3>서울에서 묵호항까지는 잠실 롯데마트 인근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간다셔틀버스가 오전 4시 30분에 출발하니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부터 준비하느라 부산하다새벽 3시에 일어나 출정 준비를 마무리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니 4시 10분이다버스 정류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나와 버스를 대기하고 있었다동행 도 4시 20분경 버스 정류장으로 정확하게 나왔다

4시 30분 셔틀버스는 거의 만차로 출발한다우리처럼 개별 자유 여행객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단체 여행 팀인 것 같았다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려 묵호 근처의 허접한 식당에 우리를 내려놓는다운임에는 아침 식비로 일인당 5천 원이 포함돼 있어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허접한 식당에 부실한 식단이다그래도 어쩔 수 없이 다 먹어치운다고난의 행군묵언수행을 하려면 많이 먹어둬 에너지를 비축해야하기 때문이다.

묵호항 여객터미널에 오전 7시 30분에 도착했다잠실에서 정확하게 3시간 걸렸다배표를 발급받고도 시간이 남는다버스로 이동하니 편안하다가면서 쉬고 자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시간도 빠르다자가용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울릉도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로 터미널 대합실이 붐비고 있었다모두들 울릉도 혹은 독도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올라 있는 것 같았다옹기종기 모여 재잘대며 울릉도행 <씨스타3>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일상에 찌들었을 때 머리를 텅 비우며 멍 때리는 것만큼 좋은 휴식도 없다여행객으로 가득 찬 터미널 대합실에서 때로는 멍 때리기도 한다동행인 도 여기저기 빈둥거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배 멀미에 약한 사람들은 멀미약을 승선 30분 전에 먹어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는데동행인 가 배 멀미에 꽤나 고생할 수도 있다며 은근히 나에게 겁을 준다나는 오래전에 연평도를 방문할 때와 통영 장사도를 여행할 때그리고 백대명산 중 하나인 사량도 지리망산을 묵언수행할 때 배를 타본 경험이 있다모두 잔잔한 바다라 동해의 거친 바다와는 그 급이 다르지만 그렇게 멀미가 심하지는 않았다그래서 그런 걱정은 추호도 하지 말라고 동행 를 안심시킨다도리어 너나 걱정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약 1시간을 기다렸나 보다. 8시 30분부터 배에 승선하기 시작한다기대가 커서 그런지 1시간 남짓인데도 오랜 시간이 흐른 마냥 지루하다. 8시 50배는 울릉도 도동항으로 출발한다우리가 탄 <씨스타(SEA STAR) 3>는 Seaspovill(소속으로 약 550톤 급비교적 대형이다승선 정원은 587석이나 되고울릉도까지 운행 시간은 최대 35노트의 속력으로 달려 편도 약 3시간이 소요된다고 배의 벽면에 제원諸元설명서로 붙어놓았다

배는 묵호항을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수평선만 보이는 동해 바다 망망대해를 달리기 시작한다오늘은 날씨가 너무 맑고 청명하다푸른 하늘에는 솜털 같은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닌다배 객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에메랄드 색 동해 바다는 조용하고 잔잔하다파도가 일렁거리지만 파고가 0.5~1m도 되지 않아 보인다배의 롤링(rolling)과 피칭(pitching)이 전혀 없었다마치 배가 얼음 위를 미끄러져 달리는 큰 썰매와 같았다배가 너무 조용히 미끄러져 달리니 이야기로 들어왔던 울릉도 여행을 가는 것 같지가 않다고생이야 좀 더 되겠지만 배가 앞뒤 좌우로 심하게 울렁울렁거려야 울렁거리는 울릉도 여행을 제대로 경험하는 것 아닌가라는 호사스런 생각도 든다그러나 이는 배 멀미의 역겨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순진하고 사치스런 생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리라.

우리는 이번 울릉도 여행이 정말 환상적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배와 바다를 즐긴다노랫가락이 절로 나온다나는 노래를 아는 게 거의 없는데도 갑자기 <울릉도 트위스트>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 ” 하면서 신나는 <울릉도 트위스트>를 흥얼거린다.

그런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걸으니 배가 조금씩 기우뚱거린다. 선실 내 화장실 구경을 좀 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배의 매점을 들러보니 거의 모든 상품이 2천 원이다. ‘새우깡, ‘맛동산, ‘고소미, 전부 2천 원이다. 월드콘도 2천 원이다. 가격이 아주 비싸다. 육지에 비해 거의 2배 이상이다. 종업원에게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아주 짧다. “배니까요.”

배를 탄 지 2시간 반 정도나 지났을까. 잔잔하게 바다에서 미끄러지던 배가 좀 더 출렁인다. 눈을 감고 있다 눈을 뜨니 갑자기 시야에 울릉도의 아름다운 경치들이 선창船窓을 통해 보이기 시작한다. 사동 항구가 보이기 시작하고 사동 해안 뒤편으로 형성된 마을과 방송 중계탑이 보이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산들이 시시각각으로 모양이 변하는 흰 구름을 이고 천태만상의 조화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선창船窓을 통해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가 희미해 감질 난다. 배 창문에는 일렁거리는 파도 물방울이 튀어 잔뜩 점적點滴을 이루고 있다. 울릉도 선경이 마치 꿈속에 나타난 듯 희미하고 오묘하다.

11시 50분경 배는 도동항에 접안했다우리가 배에서 내린 시각은 정오가 다 돼서다향후 일정은 먼저 점심을 먹고 성인봉을 묵언수행하면서 천부에 있는 숙소로 이동하는 일정이다우리가 예약해둔 숙소가 성인봉을 넘어 도동 반대편 천부항 근처에 있으니 약 10여 km 거리를 울릉도 남쪽에서 중앙을 가로질러 북단까지 넘어가야 한다

묵언수행도 식후경이다우선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는다옛 직장 동료들 중 맛집 유람 모임 멤버 중 한 분이 다녀왔다고 하면서 소개해준 <구구식당>을 찾았다우리는 따개비밥’ 두 그릇과 울릉도 특산이라는 호박막걸리’ 한 병을 반주로 주문한다우리뿐이던 식당에 젊은 아가씨 손님 세 사람이 찾아 들어온다그들은 틀림없이 맛집이라고 소개된 블로그 등 ‘SNS’를 찾아보고 왔겠지 지레짐작하면서 사진 몇 컷을 찍는 사이먼저 호박 막걸리가 나오고 이어 따개비밥이 나온다호박 막걸리 맛이 어떨까 생각하며 한 잔씩 마셔보는데아이쿠 별맛이다싱거워 뭔가 2%가 부족해 보인다나는 내륙에서 자라서 따개비라는 게 뭔지 모른다그러나 는 원래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유식한데따개비가 뭐냐고 물었더니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는다따개비는 바위 어디에 붙어 자라는 조그만 조개인데 옛날에는 먹지도 않고 버렸다고 한다나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따개비밥을 한 수저 먹어본다구수하고 쫀득한 맛이 별나다참기름이 범벅돼 있어 계속 먹으면 약간 느끼한 맛이 도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친구 는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지만 원래 참기름 범벅을 좋아 하지 않아 자기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꾸역꾸역 먹는다아니 먹어 둬야 한다울릉도 남쪽에서 그 중간을 가로 질러 북쪽에 있는 숙소까지 걸어가려면 먹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묵언수행 경로를 정했다처음에는 식당에서 KBS중계소까지도 걸어서 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울릉도 택시도 타볼 겸 택시로 KBS중계소까지 이동한 다음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기로 했다. <구구식당>에서 KBS중계소까지 2.5km 정도 거리인데 택시비는 1만 원이었다.

택시는 오후 1시 10분경성인봉으로 오르는 들머리에 도착한다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한다. KBS중계소에서 성인봉까지는 약 4km남짓한 거리다중계탑에서 좀 올라가니 도동항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이 보이고그 뒤로 에메랄드 빛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수평선 위에는 흰 구름이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흰 구름이 없다면 하늘과 바다가 경계가 없어 하늘이 바다인지 바다가 하늘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수행로 주변에 피어 있는 가을꽃들은 오염되지 않아서 그런지 색깔이 더욱 선명하고 예쁘다구름다리를 지나 팔각정에 오르니 그 아래로 동해 망망대해가 보인다에메랄드 색 망망대해는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하다눈의 피로도 몽땅 사라진다

팔각정을 지나자 수행로 주변에는 고목과 기이하게 생긴 기수괴목들이 나타난다. 고목을 두드려 보니 텅텅거리는 소리가 난다. 속이 비었나 보다.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려움을 견디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곧 아름다움이다. 기수괴목도 힘든 여러 자연 환경을 견디며 꿋꿋하고 늠름하게 살아가고 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레이더 기지인지 무슨 거대한 시설물이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성인봉 정상에 올라서도 볼 수 있었는데 아마도 저 산이 성인봉(986.7m) 다음으로 높은 천두산인가 보다. 이어 도동과 나리분지로 하산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성인봉 정상까지는 약 50여 m 거리만 남았다. 오후 3시 22분경에 성인봉 정상에 도달한다. KBS중계탑에서 출발한 지 2시간 10여 분만이다

성인봉 정상 하늘에는 새털 같은 하얀 구름이 두둥실 평화롭게 떠다니고 있다몽환적인 분위기다성인봉 정상 주변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익히 들어와 예상하고 있었지만 역시 조망이 좋다그러나 단지 주변 수목들이 듬성듬성 시야를 가리고 있어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어느 분이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아래로 내려가면 조망이 정말 좋다.”고 말한다북동쪽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렇지맞아 맞아!” 친구 에게 아래로 가자고 재촉한다약 50~100m 내려갔을까이곳에 바로 선경을 보여주는 성인봉 전망대가 있다. “우와이것이 울릉도 경치의 진면목이구나.” 하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다정신이 아찔하다.

올망졸망한 산그리메, 그 위로는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수평선 아득한 망망대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답고 상쾌한 기가 서로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공재 윤두서와 겸재 정선이 이 풍광을 그렸다면 곧바로 국보가 됐을 것이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현동자 안견이 이 풍광을 보았다면 추상적인 관념 산수화는 바로 포기했을 것 같다. 그들 관념 속에 있는 진경이 바로 그들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선경에 정신이 홀려 그리 넓지 않는 정상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본다. 아름답고도 호연浩然한 기를 마음껏 받아들이고 있노라니 해는 서쪽 바다 저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내 쪽빛 바다는 볼그레한 빛을 띤 황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더욱 환상적인 풍경을 드러낸다. 사진으로 표현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런 풍광을 뒤에 두고 발걸음을 돌리려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꾸 황금빛 물결이 일렁거리는 동해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또 돌린다. 그게 아쉬움 아니겠는가. 아쉬움이 뭉쳐지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울릉도 성인봉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성인봉에서 내려와 나리분지로 향한다. 나리분지로 향하는 수행로는 계곡을 따라 나무 데크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약간이라도 평지가 나오면 계단이 끊어지고 가파른 비탈이 나오면 바로 계단이 나온다. 계단이 무려 2500개다. 단순히 계단만을 내려오면 지루하다. 그러나 그 지루함도 주변을 둘러보면서 자연과 동화돼 내려오면 즐거움으로 바뀐다. 마음을 비우고 데크 계단 수행로를 천천히 내려간다. 수행로 주변에는 울릉도 천남성이 빨간 열매를 맺고 있다. 아름다워 덥석 따 먹고 싶은 욕망이 인다. 일반적으로 천남성은 극독 식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울릉도 천남성도 독성을 함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으로 보면서 예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먹을 수는 없었다

수행로를 계속 내려가니 <성인수>라고 이름 붙은 약수터가 나온다. 나는 약수터를 만나면 꼭 한잔씩 마셔본다. 약수터 이름도 그럴싸하다. <성인수>, 이 약수를 마시면 성인이 된다고 해서거나 성인들만 마시는 약수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 보다. 성인수를 한 모금 마시려 약수터에 가보니 바가지는 걸려 있고 약수 주위는 돌로 잘 쌓아올려 형태는 그럴 싸 한데, 물이 바싹 말라 물 한 방울도 없는 헛샘이었다. 이를 어쩌나. 나는 성인이 될 운명이 아니란 말인가. 성인수를 마시고 성인이 돼보겠다는 야무진 꿈이 무산되고 만다

성인수 대신 생수 한 모금 마시고 데크를 따라 내려오니 고목들이 저마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나무들은 나이를 먹어도병이 들어도속이 비어가도 의젓하게 자연 속에 일부분이 돼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텅 빈 고목 속에 들어가 개구쟁이들처럼 사진도 찍고 만져 보며 촉감을 느껴보기도 한다인간들이 이 좋은 풍광을 이루고 있는 텅 빈 고목 속이 썩을까 염려해서인지 투명 광택 페인트로 칠을 해두었다잘하는 짓인지는 잘 모르겠다보기에도 안쓰럽다

가을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하산 수행을 계속하는데 갑자기 산으로 삥 둘러쌓인 분지가 나온다. 이 분지가 바로 나리분지다. 분지를 삥 둘러싸고 있는 산군들은 화산 폭발로 생긴 외륜산이다. 외륜산 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바로 성인봉이고 성인봉에서 왼쪽으로는 미륵산(905m), 형제봉(717m), 송곳산(611m), 그리고 바로 바다에 인접한 기암괴석군 송곳봉(452m)이 우뚝하게 또 오뚝하게 솟아 있고, 오른쪽으로는 말잔등(907m), 천두산(968m), 나리봉(816m)이 나리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나리분지의 북서쪽에는 알봉이 있는데, 이 알봉은 해발 538m인 이중화산이며 정상에는 분화구 흔적이 남아 있다. 마치 알처럼 생겼다하여 알봉이라 불린다고 한다. 나리분지가 울릉도 화산의 소규모 칼데라 지형이며, 알봉은 이 칼데라 내 나리분지가 만들어지고 난 이후에 지하에서 마그마가 분출해 솟아올라 형성됐다고 한다

나리분지와 알봉 그리고 나리분지 외륜산을 보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데크 계단을 따라 하산하다 보니 <신령수>가 나온다. <신령수>도 약수터인데 얼른 달려가 보니 어찌된 일인가. 여기도 물이 거의 바싹 말라 있었다. <신령수>를 뒤로 하고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된 울릉 성인봉 원시림 지역을 통과한다. 원시림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려면 말잔등과 천두산을 거쳐야 하는데 탐방로가 개설돼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알봉 둘레 길 입구로 진입하여 나리분지에 있는 중요 민속 문화재 제257호인 <억새투막집>을 관람하고 천연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된 울릉 나리동의 울릉국화와 섬백리향 군락지를 거쳐 수행을 계속한다하얀 꽃을 피우며 향기를 풍기는 울릉국화는 쉽게 볼 수 있었으나 섬백리향은 잎들이 말라있어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울릉도에는 유달리 마가목이 많다마가목 열매는 빨갛다이 열매가 익으면 붉은 단풍잎보다 더 빨개진다마가목 열매는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쓰인다그런데 길을 지나가다 보니 마가목에 뭔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무언지 궁금해서 보니 그냥 돌멩이들이다왜 돌멩이를 달아놓았을까나는 나무를 위쪽으로 자라지 못하게 해 마가목 열매를 쉽게 채취하기 위한 수법이라고 단정 짓는다옛날 농업을 배울 때 복숭아 나무를 잔 꼴로 키우는 것이 한 때 유행했었는데이는 수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배웠다이것도 그 이치와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리분지에 도착한다나리분지는 전형적인 화산성 분지로 1.5~2로 좁다그러나 울릉도에 있는 유일한 평원이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변에는 성인봉을 비롯한 외륜산들이 나리분지를 감싸고 있다.

나리분지에서 다시 천부 쪽으로 넘어가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갈 것인가를 확인하다가 동행 가 스마트폰 지도를 확인하더니 여기서 우리 숙소까지 2~3km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 안내대로 우리는 나리분지 전망대로 가는 차도를 거쳐 천부로 가는 길을 택했다그 덕분에 나리분지 전망대에서 나리분지 일대를 다시 한 번 조망하기는 했다그러나 우리가 택한 수행로가 아주 잘못됐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잘못 선택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후에야 알았다. ‘티맵이 안내하는 대로 가면 차도를 따라가야 한다그러나 차도를 따라가는 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아주 심했고 헤어핀 형 도로라 꼬불꼬불하기까지 하다가도 가도 천부까지의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2km도 넘게 걸었지만 아직도 미로를 걷고 있는 듯 산속의 헤어핀 도로위에 있었다다시 티맵을 확인해보니 아니 어떻게 된 건지 천부까지 거리가 처음 확인한 거리보다 좀 더 늘어나 있었다게다가 단단한 시멘트 포장이고 내리막이 심했다내가 좀 먼저 느릿느릿 내려가고 있는데 동행 가 보이지 않는다좀 기다리니 그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아까 2500계단을 내려오면서 오른쪽 무릎 부위의 인대가 좀 아프다고 하긴 했는데 그때는 그래도 절룩거릴 정도는 아니었다지랄 같은 시멘트 포장의 내리막 차도를 내려오면서 충격을 더 받은 모양이었다더 이상 걷기가 어려워 보였다다시 티맵을 확인하니 아직 남은 거리가 2km 정도다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티맵을 확인하지 말고 먼저 이정표를 확인했어야 했다이정표를 보면서 찬찬히 확인해보았다면 차분하고도 아름다운 하이킹이 연속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이제 방법은 하나다. 지나가는 차를 무조건 잡아서 태워달라고 사정하는 방법 말고 다른 방도는 없었다. 좀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스타렉스 같이 보이는 차 한 대가 꼬불꼬불한 길을 비틀비틀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차가 10m 정도 지나갔다가 세우면서 뒤로 후진을 한다. 차문이 열리면서 젊은 총각이 내린다. 차 안을 들여다보니 젊은 남녀들이 거의 꽉 차 있었다. 우리가 탈 자리가 없어 보였다. 다시 걱정이 앞선다. 내가 체면치레로 탈 자리도 없어 보이니 그냥 가시지요라고 하자 그들은 두 명이 내리면서 맨 뒷자리로 이동하고 우리를 태워준다. 차를 타고 물어보니 분당 서울대병원 레지던트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휴가차 울릉도로 왔다고 한다. 엘리트도 보통 엘리트가 아닌 젊은이들이 이렇게 친절하고 배려심까지 많으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요즘 젊은이들에 대해 안 좋게 평가하던 내 평가가 오늘로써 새롭게  바뀌게 됐다. 

도움을 준 엘리트 젊은이들에게 또 다시 정중하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난 후, 숙소로 들어가면서 천부항 바다 쪽을 바라보니 하늘에는 저녁놀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바다는 검푸르게 변해 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정적이 천부항 주변의 모든 사물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의 다리 부상이 걱정된다. 빨리 쾌유해야 될 텐데.